fruição
savourer la vie
포르투갈어 단어인 *fruição*은 크레나크족 사상가 아일통 크레나크(『삶은 쓸모가 없다』, 2020)가 ‘유용성’에 맞서는 개념이다. 삶은 수단이 아니라 *fruição*—즐김이다. 마치 춤을 추듯 목적에 얽매이지 않고 삶을 음미하는 것. 존재에서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고, 그저 온전히 거기에 머무는 것, “광활한 대양 속 작은 물고기처럼”. 성과나 이력, 거래되는 생존으로 축소된 삶의 반대말이다.
A vida é fruição, é uma dança, só que é uma dança cósmica, e a gente quer reduzi-la a uma coreografia ridícula e utilitária.
프루이상(fruição, 브라질 포르투갈어, 비강음 끝 ~ 프루-이-상)은 신조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흔히 쓰이며, fruir(즐기다, 누리다)와 어원이 같고, 라틴어 frui(맛보다, 음미하다)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를 다시 열어젖히는 것은 아일통 크레낙의 용법이다. 그는 이 단어에 삶의 유용성을 재는 것을 거부하는 무게를 실었다. 출처는 분명하다. 단어 자체는 이미 존재하며, 발견된 것이 아니다. 변화는 형태가 아니라 용법에 있다.
프랑스어에서 이 단어가 메우는 결핍은 우리의 어림짐작에서 비롯된다. “주이상스(jouissance)”는 소유나 강렬한 쾌락으로 기울고, “플레지르(plaisir)”는 소비로 향하며, “프뤼이시옹(fruition)”은 이제 프로젝트의 완수(‘결실을 맺다’)만을 뜻할 정도로 좁아졌다. 이들 중 어느 것도 크레낙이 겨냥한 바를 담지 못한다. 삶 속에서 춤추듯 머무는 것,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음미하는 것을. 프루이상은 의식의 작용을 이름 붙인다. 존재에게 ‘무엇에 쓰이는가’를 묻는 것을 멈추는 일.
맥락 속에서. 크레낙은 유틸(utile)이라는 단어를 뒤집는다. “삶은 아무런 유용성도 없다… 삶은 프루이상이다. 우주의 춤이다.” 그는 물고기의 비유를 든다. “작은 물고기는 절대 바다에게 유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삶 그 자체다.” 그리고 그 대가를 말한다. 삶을 프루이르(fruir)하려면 “철저히 살아 있음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는 것, 생존을 흥정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 혼동하지 말 것. 프루이상은 고대 로마의 오티움(otium)도, 안식일의 휴식도 아니다. 이들은 그 외의 세계가 유용성에 지배되는 가운데 마련된 괄호에 불과하다. 이는 그리스-로마적 관점에서도 비판받는 분주함—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과도 다르다. 크레낙은 괄호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잣대 자체를 없앤다. 또한 그의 태도는 다비 코페나와의 태와도 구분된다. 야노마미의 우리히가 ‘자연’이라는 대상(객체)을 문제 삼는다면, 프루이상은 유용성(잣대)을 문제 삼는다. 아마존의 두 민족, 두 가지 거부. 이를 하나로 섞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