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ié
루소에게 연민은 동류의 고통을 보는 데서 본능적으로 느끼는 혐오로, 어떤 사유보다 앞서는 것이며 인간과 짐승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획득된 덕이 아니라 자연의 최초의 움직임이며, 인간이 생각하기 전에 받는 두 원리 중 두 번째다. 그 역할은 *<em>자기애</em>*를 완화하는 데 있다. 연민이 없다면 자기 보존은 맹목적이고 제약 없는 것이 될 것이다. *<em>자연 상태</em>*에서는 그것이 법과 풍속, 덕의 역할을 대신하며, 그 장점은 누구도 그 ‘다정한 목소리’에 거역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가 생겨난 뒤에는 관용, 자비, 우정 등이 연민에서 비롯된다. 연민은 *<em>자기애</em>*를 이어가되 *<em>자존심</em>*과는 혼동되지 않는다. *<em>자존심</em>*은 비교와 사유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Il est donc certain que la pitié est un sentiment naturel, qui, modérant dans chaque individu l’activité de l’amour de soi-même, concourt à la conservation mutuelle de toute l’espèce.
루소는 자연인의 내면에 이성에 앞서는 두 가지 원동력을 부여한다. 하나는 자기 보존을 향한 충동이며, 다른 하나는 “동류의 고통을 보는 데서 느끼는 선천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이 두 번째 원동력이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철학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반성이라는 행위를 앞서는 만큼 보편적이고 유용한 것”이며, 자연스러운 나머지 짐승들조차 그 징표를 보인다. 말이 살아 있는 몸을 짓밟기를 꺼리고, 가축은 도살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동요한다. 연민은 도덕의 정교함이 아니라, 도덕의 토대다.
연민의 역할은 조절이다. 자기 보존에만 몰두한다면 인간은 절제를 잃을 것이다. 연민은 “각 개체에서 자기애의 활동을 완화하여, 종 전체의 상호 보존에 기여한다.” 연민은 억누르되 없애지는 않는다. 자연 상태에서는 법도 없고 치안도 없지만, 연민이 “법과 풍속과 덕을 대신”하며, 그 힘은 누구도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역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연민은 외부가 명령하지 않는다. 숙고에 앞서 내면에서 말을 건다.
루소는 이 단 하나의 성향에서 모든 사회적 덕을 끌어낸다. “관용, 자비, 인간애란 무엇인가? 약자, 죄인, 혹은 인류 전체에 적용된 연민에 다름 아니다.” 우정조차 한 대상에 고정된 지속적인 연민일 뿐이다. 연민을 파괴하는 것은 이성이다. “이성이 자기애를 낳는다.” 이성은 인간을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게 하고, 고통받는 이를 보며 이렇게 말하게 한다. ‘네가 죽든 말든, 나는 안전하니까.’
자기애와는 구분된다. 연민은 고통받는 이에게로 우리를 이끌어내지만, 자기애는 비교를 통해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되돌린다. 하나는 최초의 움직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에서 생겨난 반성적 열정이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덕—이성을 통해 획득되는 덕—과도 다르다. 연민은 배울 것이 없다. 생각하기 전에 행동한다.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루소는 지적한다. 인류의 보존이 오로지 이성에만 의존했다면. 마지막으로 연민은 자기애와 대립하지 않는다. 연민은 내적 교정자다. 적대적인 힘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는 동일한 본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