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puissance des méchants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제4권의 역설적 주장: 악인은 강하지 않고 *약하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동일한 목적, 즉 [최고선](/lexique/souverain-bien/)을 추구한다. 그러나 선한 사람은 자연스러운 수단인 덕을 통해 이를 이루는 반면, 악인은 부자연스러운 수단에 의존하다가 결국 가장 원하는 것을 놓치고 만다. 해를 끼치는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니다. 악은 «*무(無)*»이므로, 악만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다. 모든 것을 얻은 듯 보이는 악당조차 유일하게 중요한 것을 얻는 데 실패한다. 이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동의)을 다루는 스토아의 [에페헤민](/lexique/eph-hemin/)과 구분된다. 에페헤민은 진정한 힘이 아니라 내면의 지배에 관한 것이며, [포르투나](/lexique/roue-de-la-fortune/)의 은총은 악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으나, 여전히 선을 행할 힘은 주지 않는다.
Car si le mal n’est rien, comme je l’ai démontré il n’y a qu’un instant, les méchants ne pouvant que le mal, on doit conclure qu’ils ne peuvent rien.
모든 인간은, 「선하든 악하든 간에, 누구나 똑같이 열성을 다해 선에 이르려고 애쓴다」— 이는 이미 제3권에서 확립된 사실이다. 그 열망은 보편적이다. 다만 그 길이 다를 뿐이다. 선한 자는 자연스러운 길, 즉 덕을 따라 나아가고, 그 목적지에 도달한다. 악한 자는 「가장 다양한 욕망」을 통해 그리로 달려들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수단이 아니기에— 결국 목적지에 이르지 못한다.
보에티우스는 이를 걸음걸이에 비유해 보여준다. 자신의 두 발로 걷는 자는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수단을 잃은 자는 「손으로 걷기를 시도」하지만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한다. 후자가 더 몸부림친다고 해서 더 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필요한 기관을 갖추지 못했기에, 오히려 더 약한 것이다. 악한도 마찬가지다. 그가 밤낮으로 좇는 가장 높은 선은, 바로 악한들이 「도달할 수 없는」 바로 그 것이다.
이제 문자 그대로의 논리가 엄밀하게 펼쳐진다. 해를 끼치는 능력이 힘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은 그 반대다. 악한들은 「악을 행할 수 있지만, 만일 그들이 선한 자들의 능력을 간직했다면 악을 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악은 존재의 결여일 뿐— 실체가 아니므로— 악만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악을 행할 가능성은 「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정한 힘은 언제나 그 목적인 선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가장 냉혹한 결론이 도출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공통 목적」을 포기한 자들은, 마찬가지로 존재하기를 멈춘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은 이를 「시체」라 부르면서도 단순히 「사람」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처럼, 악한은 이름만 남고 실체는 잃는다. 범죄는 선에서 일부 힘을 빼앗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몰락이다.
스토아학파의 에페헤민과 구분해야 한다. 에픽테토스는 세상사를 ‘내게 달린 것’과 ‘내게 달리지 않은 것’으로 나누고, 현자는 외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자신의 동의만을 다스림으로써 자유롭다고 본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이러한 내적 통치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적인 힘, 즉 최고선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한다. 악한은 외부 사물을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지만, 그 계산대로라면 여전히 근본적으로 무력할 뿐이다.
또한 포르투나의 은총과도 구분해야 한다. 권력을 쥔 폭군이 언젠가 돌아갈 운명의 수레바퀴에 의해 부정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결코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당한다. 세속적 성공은 그의 무력함을 없애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위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