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실재의 본질
두 가지 흐름의 시선: 영원한 입자인가, 영혼의 신장인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시간은 이음새 없는 직물처럼 펼쳐지며, 그 안의 실 하나하나가 영원히 움직이는 입자다. 적어도 루크레티우스는 겉모습의 장막을 꿰뚫어 원인의 광활함을 포착할 때 그렇게 말한다. 시간은 사물이 일어나는 틀이 아니다. 시간은 바로 그 사물들, 허공을 가로지르는 그들의 끝없는 춤이다. 실재는 물질의 흐름으로 주어지며, 모든 것은 이미 그곳에,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뿐이다.
원자의 운동으로서의 시간
내 눈은 허공을 가로질러, 내 발 아래 사물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하지 않으리. 그대가 주는 힘으로, 원인의 심연까지 밝혀지는 자연의 광활을 볼 때, 내 존재 전체를 뒤덮는 신성한 전율, 어떤 거룩한 황홀감이 느껴지는 것을.
이 전율은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전율이다. 시간은 우주의 직물 그 자체, 끝없이 펼쳐지는 입자들의 조합과 해체다. 기원도 없고 종착점도 없다. 원인들은 맹목적인 필연 속에서 이어지며, 인간은 그것을 응시함으로써 일종의 평온에 이른다. “거룩한 황홀”은 모든 것이 연결된 이 시각에서 비롯된다. 현재는 더 큰 운동 속에서 포착된 한 순간에 불과하다. 시간은 측정의 대상이 아니라 사물의 실체 그 자체, 그들의 영원한 생성이다.
여기서 실재는 시간과 혼연일체다. 실재는 원자의 운동 외에 다른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 “힘”은 원인의 심연까지 밝혀주는 힘이다. 광활은 저 너머가 아니라, 눈이 환상의 장막을 꿰뚫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시간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체험해야 할 자명함이다.
영혼의 신장으로서의 시간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외부적 흐름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시간을 영혼의 내면적 긴장으로 본다. 입자의 운동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영혼 자체에서, 영혼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에로 향하는 능력에서 찾는다. 시간은 실체가 아니라 경험, 인간이 영원성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 마음을 누가 멈출 수 있을까, 누가 고정시킬 수 있을까? 그것이 한순간이라도 안정되게 열려, 움직이지 않는 영원의 찬란함을 직관하고, 그것을 시간의 가변성과 비교하여 모든 비교가 불가능함을 깨닫게 하려면? 지속이란 동시에 펼쳐질 수 없는 운동의 연속일 뿐임을, 반면에 영원은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으며 온전히 현재로 머무는 것을 보게 하려면? 미래는 과거를 밀어내고, 모든 과거와 미래는 언제나 현재인 영원으로부터 존재와 흐름을 얻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신장이다. 영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팽팽해지며, 현재는 끊임없이 달아난다. 이 긴장은 고통스럽다. 그것은 시간을 온전히 포착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원은 전혀 다르다. 영원은 지나가지 않으며, 온전히 현재다. 반면 시간은 공존할 수 없는 운동의 연속이다. 미래는 과거를 밀어내고, 현재는 그 둘 사이에서 잡히지 않는 점일 뿐이다.
이 시각은 세계의 서술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에 대한 명상이다. 시간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영혼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영원은 개념이 아니라, 시간을 가능하게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존재다. 마음은 고정되고 그 존재에 열리려 하지만, 순간 속에서만 가능하며 그 순간은 언제나 달아난다.
동일한 수수께끼를 향한 두 갈래 길
루크레티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같은 시간을 말하지 않지만, 어쩌면 같은 실재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은 그것을 물질의 흐름으로 보고, 다른 사람은 정신의 긴장으로 본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시간은 최종적인 포착을 피해간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시간은 원인의 광활함, 모든 것이 이미 주어진 끝없는 운동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시간은 인간과 영원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신장이다. 한 사람은 시간을 실재의 직물로 제시하고, 다른 사람은 시간을 지나가지 않는 것과 우리를 분리하는 경험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시간은 소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을 무한한 구경으로 응시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원으로의 개방 속에서만 풀릴 수 있는 수수께끼로 본다. 한 사람은 거기서 “거룩한 황홀”을 찾고, 다른 사람은 신의 현존 속에서만 해소될 수 있는 긴장을 느낀다.
어쩌면 이 두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를 넘어서는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 시간은 완전히 외부도 아니고 완전히 내부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것이다. 원자의 운동 속에서 주어지는 동시에 영원 속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지혜가 이 두 시각을 함께 견디는 데 있다면 어떨까? 시간을 물질의 흐름이자 영혼의 신장으로 보고, 한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루크레티우스의 전율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긴장은 동일한 경험의 두 면일 뿐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우리를 피해가면서도 우리를 구성하는 실재의 경험.
인용된 출처
- Lucrèce, De la nature des choses, 판. , 번역. André Lefèvre.
- Augustin d'Hippone, Les Confessions, 판. , 번역. M. More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