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적 이성과 그 한계: 인간 자율성과 신적 질서의 예속 사이에서

기술의 오만과 조화로운 선재질서

도구적 이성과 그 한계: 인간 자율성과 신적 질서의 예속 사이에서
니콜라 푸생 — 맹인 오리온의 해돋이 탐색 (165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CC0.

인간의 이성은 두 가지 암초 사이에서 전개된다. 하나는 이성을 넘어서는 도구요, 다른 하나는 이성이 포착하려 드는 진리다. 하나는 현대적이며, 다른 하나는 중세적이다. 전자는 이성이 해방자라 믿으면서도 실은 예속시키는 오만을 비판하고, 후자는 인간의 자율성이 신적 질서와 만나는 자연적 한계를 탐구한다. 이 두 관점을 구분한 뒤 그 공통된 정점을 찾는 것은, 한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하거나 무분별하게 대립시키는 오류를 피하기 위함이다.

도구에 의해 소외된 이성

도구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손길을 연장하고 의도를 정밀하게 다듬어 용도에 봉사할 뿐이다. 그러나 제도가 그 도구를 독점하면, 도구는 본래의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 본질을 바꾼다. 일리히는 이를 직설적으로 말한다.

제도가 다룰 수 있는 도구를 독점하는 것은 남용이다. 도구의 용도를 왜곡하지만, 그렇다고 도구 자체가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살인자의 칼이 여전히 칼인 것과 마찬가지다.

Ivan Illich, La Convivialit  — 판. , 번역. viasophia

도구는 여전히 칼이지만, 그 용도는 살인이 된다. 도구적 이성은 제도에 종속될 때 그 형태를 잃지 않는다. 여전히 수단일 뿐이지만, 그 목적은 상실된다.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는 질서에 봉사하게 된다. 칼은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쥐는 손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소외는 도구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자유로워진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도구를 유일한 길로 삼으려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이성은 그때 자신을 배반한다. 수단을 늘리는 것이 곧 해방이라 믿지만, 실은 그 수단을 지배하는 자들의 노예가 된다.

이 왜곡은 필연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의 결과이거나, 아니면 굴복의 산물이다. 제도에 의해 전용된 다루기 쉬운 도구는 권력의 도구가 된다.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해야 할 이성은 자신의 창조물에 사로잡힌다. 남용을 보지 못하는 것은, 더 많은 도구가 곧 더 많은 자유라는 생각을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자의 손에 쥐어진 칼도 여전히 칼이다. 이성이 자신의 목적을 부정하는 데 쓰일 때도, 이성은 이성이다.

신적 질서 앞에 선 이성

일리히가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는 오만을 지적한다면, 이븐 루슈드는 다른 차원을 탐구한다. 신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의 가능성, 그러나 명확한 경계 안에서만. 『결정적 논변』은 도구가 아니라, 지식의 경제 안에서 인간의 이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논한다. 아랍어 원문 여백에 편집자가 기입한 숫자들은 이 사유가 엄밀한 틀 안에서 이루어짐을 상기시킨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중요하다.

— 여백의 숫자는 M.이 편집한 아랍어 원문의 쪽수를 가리킨다.

Averroès (Ibn Rushd), Discours décisif — Accord de la religion et de la philosophie (Faṣl al-maqāl)  — 판. 프랑스어 번역본(레옹 고티에 역)을 따른 알제 Fontana, 1905(아랍어 원문 및 불역), 번역. viasophia

이 기술적인 언급은 겉보기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븐 루슈드에게 인간의 이성은 자율적이고 무한한 힘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 전통, 그리고 그것을 앞서는 질서라는 틀 안에서 작동한다. 여백의 숫자들은 임의적인 주석이 아니다. 원문과 권위를 가리키며, 사유를 구속하는 틀을 상기시킨다. 이성은 주권적이지 않다. 해석하고, 주석을 달고, 이해하려 애쓰지만, 언제나 그것을 넘어서는 주어진 것의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 이성은 수동적이지 않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구분하고, 매개 없이 신적 질서를 파악하려 한다. 하지만 이 탐구에도 경계는 있다. 아무리 예리한 인간의 이성도 신적 진리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그 윤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는 있지만, 언제나 선재하는 조화의 한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여백의 숫자들은 이를 상기시킨다. 사유는 텍스트 안에 자리하고, 텍스트는 더 큰 질서 안에 자리한다.

공통의 정점: 이성과 한계

일리히와 이븐 루슈드의 관점은 언뜻 멀어 보인다. 하나는 도구와 제도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텍스트와 신을 논한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질문으로 수렴한다. 인간은 어떻게 이성의 능력을 행사하면서도 그 전능성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가?

일리히에 따르면, 이성은 수단을 늘리는 것이 곧 해방이라고 믿을 때 길을 잃는다. 제도에 의해 전용된 도구는 덫이 된다. 이성은 더 이상 인간을 섬기지 않고, 그것을 통제하는 질서에 봉사한다. 본래의 목적을 잊고, 지배자가 된다.

이븐 루슈드에게 이성은 자연적 한계에 부딪힌다. 신을 파악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그것을 넘어서는 질서의 경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텍스트 여백의 숫자들은 이를 상기시킨다. 사유는 틀 안에 자리하고, 그 틀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이성은 주권적이지 않다. 해석할 뿐, 자신이 이해하려 하는 질서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공통의 정점은 종합이 아니라, 지속되는 긴장이다. 인간 이성은 자신을 충실히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전능하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고귀한 의미에서 도구일 뿐이며, 분별력을 가지고 다뤄져야 한다. 기술의 오만 앞에서든, 신적 질서 앞에서든, 이성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주인도, 노예도 아닌, 그것을 넘어서는 진리를 섬기는 종이어야 한다.

이 긴장은 실패가 아니라 조건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이성은 폭군이 되고, 한계를 절대화하는 이성은 메마른다. 그 사이에는 지혜의 공간이 있다. 구분하면서도 분리하지 않는 지혜, 그리고 그 구별 속에서 조화의 길을 찾는 지혜가 그것이다.

인용된 출처

  • Ivan Illich, La Convivialit, 판. .
  • Averroès (Ibn Rushd), Discours décisif — Accord de la religion et de la philosophie (Faṣl al-maqāl), 판. Alger, Fontana, 1905 (texte arabe + trad. française), 번역. Léon Gauth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