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를 절망 없이 이야기하기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는 서사를 짜다
무너지는 것은 세계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 세계를 이야기하는 방식도 함께 허물어진다. 불안을 의미 있게 엮어내는 서사는 장식이 아니다. 그 서사들은 우리가 서 있을 수 있는 땅 그 자체가 된다. 두 가지 목소리, 두 가지 방식으로 그 땅을 바라보는 시선. 하나는 불안정한 속에서 파편들이 어떻게 조립되는지를 관찰하고, 다른 하나는 그 파편들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의 싹을 찾는다. 어느 쪽도 진리를 주장하지 않지만, 각각은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한다.
번역 가능성으로서의 불안
안나 칭은 붕괴를 하나의 사건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형태들이 불확실성 속에서 재구성되는 상태다. 그때 생겨나는 것은 조화로운 전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요소들이 만나 서로 응답하는 일련의 만남이다. 그녀가 말하는 조끼는 단순한 옷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적 정체성과 생물학적 종이 교차하는 장소이며, 두 개의 별개였던 이야기가 갑자기 서로 번역될 수 있게 되는 지점이다.
이 조끼는 민족성(이족)과 종(버섯)을 번역하며, 이러한 번역 가능성을 통해 이 요소들은 다른 유동적인 만남의 이야기들 속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번역 가능성은 지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가는 조건이다. 기준이 허물어지는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범주의 안정성이 아니라, 그 범주들이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조끼는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적인 사물이다. 조끼는 그렇지 않았다면 서로 분리된 채로 남았을 것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불안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새로운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성은 해결책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방식들이다.
칭은 통일된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조립되었다가 해체되는 파편들, 겹치지만 섞이지 않는 이야기들을 묘사한다. 생겨나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부분적인 세계들의 연속이다. 그 세계들은 절대적인 일관성을 요구하지 않는 한에서 살아갈 만하다. 회복력은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번역 가능성의 결과다. 회복력은 언뜻 관련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능력에서 태어난다.
현재의 틈새로 스며드는 유토피아
에른스트 블로흐에게 붕괴는 상상력이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균열이다. 무너지는 것은 질서만이 아니다. 그 질서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도 함께 허물어진다. 이 균열 속에서 희망은 위안이 아니라 동력이 된다. 그것은 찬란한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사고를 통해 그 미래를 실현하는 것이다.
가상 국가에서의 삶을 묘사한 소설들, 예를 들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같은 것들.
블로흐에게 유토피아는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탐구다.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세계를 묘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능성으로서의 세계, 만들어지고 있는 세계를 그린다. 그가 말하는 소설들은 오락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상상력은 피난처가 아니라 현실을 변혁하는 도구다. 중요한 것은 묘사된 세계의 완벽함이 아니라, 그것이 길을 열어 보이고 다른 구성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능력이다.
블로흐는 불안을 부정하지 않지만, 거기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희망은 순진한 믿음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것은 현재의 틈새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미래의 징후를 찾는 일이다. 유토피아는 꿈이 아니라 능동적인 예상이다. 유토피아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지만, 집단적 행동을 가능하게 한다. 유토피아는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한다.
짜되 결론짓지 않기
이 두 목소리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 응답한다. 칭은 파편과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묘사한다. 블로흐는 그 파편들을 다른 무언가를 건설하기 위한 재료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하나는 불안이 어떻게 번역 가능성의 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그 번역 가능성이 변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칭의 조끼와 블로흐의 유토피아는 해결책이 아니다. 그들은 제안이다. 전자는 붕괴 속에서도 서로 다른 요소들이 서로 메아리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후자는 그 메아리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싹임을 상기시킨다. 어느 쪽도 불안이나 절망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그것을 다르게 살아가자고 제안할 뿐이다.
붕괴를 절망 없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붕괴의 심각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서사가 확실성이 아니라 짜임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짜임새는 취약하고 불완전하며, 끊임없이 다시 짜야 한다. 그러나 그 짜임새를 주의 깊게 바라보기만 한다면, 살아갈 수 있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인용된 출처
- Anna Tsing, Le Champignon de la fin du monde, 판. .
- Ernst Bloch, The Principle of Hope, 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