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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숲의 자궁: 사유의 모태이자 저항의 원천"
sousTitre: "다비 코페나와의 목소리에 기대어"
description: "『하늘의 몰락』에서 다비 코페나와는 야노마미의 숲을 경관으로 여기지 않고 살아 있는 육체로 드러낸다. 그 자궁(urihi a pree)은 꿈과 사유, 그리고 파괴에 맞서는 힘을 잉태한다. 대지의 숲이 존재의 모태로서, 저항이 세계와의 육체적 관계에서 비롯됨을 성찰하는 글."
date: 2026-09-25
lang: ko
tradition: yanomami
auteurs: ["다비 코페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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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의 자궁: 사유의 모태이자 저항의 원천

숲

숲은 배경이 아니다. 또한 단순한 ‘자연환경’이라는 개념도 아니다. 그 개념은 외부적 외피로 축소되어 결국 스스로의 해체를 정당화해왔다. 다비 코페나와에 따르면, 숲은 하나의 온전한 몸, *mundo inteiro*다. 그의 언어로 *[urihi](https://viasophia.org/lexique/urihi/) a pree* 혹은 *urihi a pata*라 불리는 이 말은 대지-숲 전체, 지상 세계의 총체를 가리킨다. 이는 은유가 아니다. 살아 숨 쉬는 경험이며, 숲이 호흡하고 피 흘리며 꿈꾸고 잉태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자궁, *urihi a pree*는 시적 비유가 아니다. 생각과 이야기, 그리고 숲을 갈가리 찢으려는 자들에 맞서 버틸 힘을 낳는 곳이다.

> 다비 코페나와는 포르투갈어로 *mundo inteiro*라는 표현을 사용해 야노마미어 *urihi a pree* 또는 *urihi a pata*(‘대지-숲 전체’)를 번역한다. 이는 지상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
> — **Davi Kopenawa**, *La Chute du ciel*, livre 667. éd. 프랑스어 번역(브뤼스 알베르, 야노마미의 증언 기록 및 번역)을 바탕으로.

*[Une voix de l'intérieur]* 샤먼이자 야노마미 대변인인 다비 코페나와는 숲을 몸처럼 듣는 법을 배운 자의 위치에서 글을 쓴다. 여기 실린 프랑스어는 원문의 엄밀함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 살을 배반하지 않는 우리 번역이다. 숲은 결코 대상이 아니다. 때로는 굶주림 속에서, 때로는 두려움 속에서, 언제나 의존 속에서 대화하는 주체다.

## 살아 있는 몸으로서의 숲

다비 코페나와는 숲을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리듬을 좌우하는 유기체로 바라본다. 숲에는 굶주림의 계절이 있다—사냥감의 고기에 대한 굶주림, 식물의 양식에 대한 굶주림. 악령이 출몰하는 막힌 곳, *[urihi](https://viasophia.org/lexique/urihi/) komi*와 아득한 옛 시절의 기억을 품은 광활한 고대 영역, *urihi a pata*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생태학적 분류가 아니라 내밀한 지도다. 각 용어는 구체적인 관계를 가리킨다. 숲은 먹이를 주는 자궁, 피부를 보호하는 피부,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다.

이러한 관점은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뒤집는다. 우리가 ‘환경’이라는 말을 쓸 때—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것 사이의 분리를 전제하는 단어—다비 코페나와는 나눌 수 없는 전체를 말한다. *mundo inteiro*는 틀(frame)이 아니라 모태(matrix)다. 숲은 우리를 에워싸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숲 안에 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것처럼. 이 역전은 사소하지 않다. 숲의 파괴는 외적인 손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절단이다. 대지가 피를 흘릴 때, 그것에 의존하는 이들의 몸도 찢어진다.

## 자궁으로서의 사유의 원천

숲이 자궁이라면, 거기에서 태어나는 생각은 추상적 구성이 아니라 유기적 발현이다. 다비 코페나와는 사유와 세계의 살을 분리하지 않는다. 꿈, 노래, 샤머니즘의 이야기는 인간과 대지-숲 사이에서 흐르는 체액이다. 그것들은 정신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연결된 이 공동 모태, *[urihi](https://viasophia.org/lexique/urihi/) a pree*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개념은 ‘자연’을 문화와 분리된 영역으로 보는 관념 자체를 뒤흔든다. 야노마미에게 야생과 문명, 사고와 경험 사이에는 경계가 없다. 숲은 자원의 보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협상해야 하는 동반자다. 다비 코페나와가 ‘숲의 잔해’, *[urihi](https://viasophia.org/lexique/urihi/) a xee hëaɨwi*를 말할 때, 그것은 사라져가는 생태계에 대한 한탄이 아니다. 절단의 확인이다. 남은 것은 온전한 몸이 아니라 유령의 사지, 찢겨 나간 것을 상기시키는 고통스러운 존재다.

## 자궁으로부터의 저항

이러한 관점에서 저항은 정치적 전략이 아니라 생존의 필연이다. 그것은 이념에서 비롯되지 않고 대지-숲과의 육체적 관계에서 나온다. 다비 코페나와는 불도저와 침략자들이 가져온 질병에 맞서는 힘이 추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살아 있는 모태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숲은 투쟁의 상징이 아니다. 숲 *자체가* 투쟁이다. 나무 한 그루가 베이고 강 한 줄기가 오염될 때마다 우리를 품고 있는 자궁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자연환경’이나 ‘생물다양성’ 같은 서구의 개념을 새로운 빛으로 비춘다. 다비 코페나와는 이러한 단어들이 숲을 자원이나 생태계 서비스의 집합으로 축소함으로써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 뿐 존중해야 할 주체로는 여기지 않음을 지적한다. *meio ambiente*(자연환경)는 옛 ‘자연’의 잔재일 뿐이다. 산업에 포위된 잔여 공간이다. 야노마미의 숲은 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온전한 세계, *mundo inteiro*다.

## 저항으로서의 꿈

이러한 우주관에서 꿈은 도피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다. 야노마미의 샤먼들은 숲을 살리기 위해, 숲을 채우는 정령들과 협상하기 위해, 기계가 가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숲을 꿈꾼다. 꿈은 능동적인 저항의 한 형태다. 숲이 죽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생각과 이야기, 힘을 잉태하고 있음을 재확인하는 방식이다.

다비 코페나와는 숲의 파괴가 단순한 생태학적 재앙이 아니라 사유 능력 자체에 대한 공격임을 상기시킨다. 대지-숲의 자궁이 훼손되면, 세계 안에 존재하는 방식 전체가 무너진다. 그렇다면 저항은 나무나 동물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고, 그 대가로 우리를 위해 싸울 힘을 주는 이 모태를 보존하는 일이다.

## 출처

- Davi Kopenawa, *La Chute du ciel* — Plon, coll. Terre humaine, 2010, 번역. Bruce Albert (propos yanomami recueillis et traduits)


표준 출처 : https://viasophia.org/ko/reenchanter/2026-09-25-uterus-foret-matrice-pensee-resistance/
